3ㆍ15 란?
독재정권, 3ㆍ15 부정선거에 항거 / 시민ㆍ학생 한마음 민주화 외침
1960년 3월 15일 정ㆍ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자유당 정권은 사전 대리투표와 완장 부대를 동원한 공포 분위기 조성, 3인조, 5인조 묶음으로 공개투표, 일부 유권자에게 선거 번호표 미발급 등 부정선거를 통해 이승만 정권의 장기집권을 유지하려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공공연한 부정선거가 목격되자 민주당은 선거 포기를 발표하였으며 이제까지 독재정권에 지쳐 있던 시민과 학생들은 부정선거와 독재정권에 반대하여 과감하게 들고일어났습니다. 시민과 학생들은 머리에 흰 띠를 두르고 부정선거를 규탄하며 “민주주의 만세”와 “자유당 정권 물러가라.”를 외치면서 거세게 항거하자 진압대는 최루탄과 위협사격으로 대응하였습니다. 시위는 밤까지 계속되어 새벽 3시경에야 멎었습니다.

이날 항의 시위를 하던 시민 중 10여명이 진압대의 총탄에 맞아 목숨을 잃고 80여 명이 부상을 당하였습니다. 다음날에는 수많은 시민ㆍ학생들을 공산주의자로 몰아 폭행과 감금을 일삼았습니다. 사태가 잠시 주춤해졌을 때, 3월 15일 시위에서 행방불명되었던 마산상고(현 용마고)에 새로 입학한 김주열군의 시체가 4월 11일 오전 11시 30분경 마산 중앙부두 앞바다에 떠올랐습니다. 시체는 끔찍하게도 오른쪽 눈에 불발된 최루탄이 박혀있는 모습이었습니다. 이 참상을 본 마산 시민과 학생들의 분노는 하늘을 찔렀으며, 시위행진이 계속되었습니다. 날이 저물자 데모군중은 수를 헤아릴 수 없었고 진압대와의 싸움은 자정까지 계속되었습니다. 다음날 마산공고 학생 수백 명이 교문을 빠져나와 데모를 시작하자 마산고, 창신고, 마산상고(현 용마고), 마산여고, 제일여고 등 수 천 명의 학생들이 시내 여기저기서 시위를 벌였으며, 성지여고, 마산 여ㆍ중고생 800여명은 김주열군 영정에 바칠 헌화를 들고 침묵의 시위행진을 진행하다가 소방차의 물세례와 진압대의 공포 발사를 받았습니다. 이에 일부 시장 상인들은 모두 문을 닫고 시위에 나섰으며 데모 군중들은 시내를 누비며 자유당 정권의 퇴진을 외쳤습니다. 마침내 마산시민의 부정과 불의에 항거하는 의거로 인해 4ㆍ19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또한 3ㆍ15의거의 고귀한 정신을 발전 계승시키기 위하여 기념탑과 함께 건립한 3ㆍ15회관은 시설이 오래되고 노후하여 1992년 폐쇄하고 새로운 기념회관 건립을 추진 중에 있습니다. 그리고, 순직한 영령들의 묘가 개별적으로 산재되어 있던 것을 1968년 구암동 뒷산 애기봉에 모아 최초 묘역을 조성하였습니다. 그 후 마산을 민주화 운동의 구심점으로서의 역할을 다하고자 묘역 주변을 확장하여 성역 묘역, 유영봉안소, 기념관, 참배단, 기념탑 등을 건립하고 성역공원으로 조성하였으며, 그간 4ㆍ19혁명에 물려 상대적으로 희석됐던 3ㆍ15의거의 위상을 높이고자 정부에 국립묘지 지정을 신청하여 2003년 3월 15일 국립 3ㆍ15 묘지가 준공되었습니다. 그리고 1993년 10월 19일에는 3ㆍ15의거기념사업회를 조직하여 3ㆍ15의거를 재조명하고 유족지원, 희생영령의 추모사업을 추진하고 매년 추도제전, 기념식, 합동묘소참배, 웅변대회, 문학의 밤, 백일장, 마라톤 등의 기념행사를 개최하고 있습니다. 이에 우리 모두 3ㆍ15 영령들의 숭고한 정신을 영구히 계승 발전시키는데 합심 노력해야 할 것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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